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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목 [주간조선] 한국의 老鋪 106년 4代 이어온 안성주물
    작성자 허회욱 (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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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일 2016-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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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회수 905

    [2434호] 2016.11.28

    [한국의 老鋪] 106년 4代 이어온 안성주물

    두 번의 부도를 이겨낸 힘 “사람에게 도움되는 제품을 만들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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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안성주물 3대 김종훈 주물장(오른쪽)과 4대 김성태 대표 부자. photo 이신영



     ‘쉬이익~’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족히 수백 도가 넘는 새파란 화염이 1m 길이의 금속 파이프를 타고 세차게 뿜어져 나온다. 새파란 화염이 은회색 무쇠솥 위로 쏟아진다. 그렇게 5분여. 뜨거운 화염을 그대로 맞은 은회색 무쇠솥이 거무스름하게 변신해간다. 뜨겁게 달궈져 검은빛이 돌면 곧바로 참기름을 듬뿍 머금은 붓 머리가 무쇠솥 표면을 휘~휘 빠르게 오가는 붓질이 이어진다. 무쇠솥 위로 붓질이 시작되면, 참기름이 익어 기화된 흰 연기와 고소한 향이 주변을 가득 채운다. 그 작업을 3~4회 반복하자 은회색 무쇠솥은 완전히 사라지고 비로소 반짝반짝 윤기가 흐르는 짙은 검은색의 가마솥 하나가 눈앞에 등장한다. 주물 장인의 손을 통해 전통 방식으로 만들어지는 가마솥 작업 중 마지막 모습이다.
       
       100년 넘는 세월 동안 4대째 가마솥 등 주물 제작의 명맥을 이어온 곳이 있다. 안성주물이다. 이 안성주물을 찾아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어진 주물 장인(匠人)의 이야기를 들어 봤다.
       
       서울 강남에서 자동차로 1시간을 조금 넘게 달리면 도착하는 경기도 안성시 양촌리의 한 국도변. 높이가 20m는 족히 돼 보이는 짙은 고동색의 굴뚝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단단한 선철을 녹이는 안성주물의 용광로 굴뚝이다. 그 용광로 굴뚝 밑 빈터에 차를 세우자 안성주물 4대 김성태(53) 대표가 기자 일행을 맞았다. 김 대표의 안내를 받아 사무실로 들어서자 안성주물의 3대 김종훈(86) 주물장이 “추운데 먼 길 오느라 힘들지 않았냐”며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여든여섯에도 주물 공장 현장을 지키는 김종훈 주물장은 경기도 무형문화재 45호. 전통 방식으로 주물 제작을 하는 한국에서 유일한 장인이다. 김성태 대표는 김종훈 주물장의 아들로, 그 역시 전통 주물 기술을 잇고 있는 ‘전수자’다.
       
       안성주물의 시작은 106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충청북도 청원의 농부였던 김성태 대표의 증조할아버지 고(故) 김대선씨가 1900년대 초 조선의 3대 시장 중 하나로 불리던 안성장(場)이 서던 경기도 안성으로 솔가했다. 안성에 터를 잡은 김대선씨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안성유기 공장에서 일을 시작했다. 이곳에서 놋그릇을 다루는 유기 방짜 기술과 무쇠를 다루는 주물 기술을 익혔다.
       
       
       가마솥 때우기로 시작된 주물 100년
       
       이 기술을 바탕으로 1910년 안성장 한편에서 쇠를 녹여 가마솥을 때우는 일을 시작했다. 이것이 안성주물의 첫 시작점이다. 안성장 한편에서 가마솥을 때우던 106년 전 김대선씨의 모습은 한국 근대사의 인상 깊은 한 장면으로 남아 있다. 106년 전 안성장을 찾은 한 외국인 선교사가 가마솥을 때우는 안성주물 1대 장인 김대선씨를 사진으로 남겼고, 당시 서양인들에게 조선 사람의 일상으로 소개됐던 이 사진이 발견되며 안성주물 106년의 역사가 확인된 것이다.
       
       이후 김대선씨는 가마솥 수리 가게를 열었고, 1919년부터 가족과 함께 작은 공장을 세워 가마솥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 공장을 아들인 안성주물 2대 고(故) 김순성씨가 이어받았다. 김순성씨는 현재 안성시청이 있는 안성시 봉산동에 자리를 잡고 1934년 가마솥 공장을 현대적인 주물 공장으로 확장했다. 일제강점기에는 가마솥 제작을 위한 철을 배급받아야 했다. 배급받은 불순물 가득한 철의 순도를 높이기 위해 기술력과 제조 숙련도를 끌어올려야 했다. 그렇게 기술을 끌어올린 안성주물의 가마솥은 1945년 광복 이후 서울과 경기도에서 인기 있는 살림도구로 입소문이 나기도 했다.
       
       이 무렵 3대인 김종훈 주물장이 아버지 김순성씨의 뒤를 이어 안성주물을 맡게 된다. 그가 서울대 농학과 3학년생 스물두 살 때이던 1953년이다. 김 주물장은 “그때는 평생 가마솥을 만들 거란 생각을 해본 적이 전혀 없었다”며 “금방 학교로 돌아가 다시 공부를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며 웃었다.
       
       “1953년 전쟁통에 아버지가 많이 아팠어요. 전쟁이 끝나고 20여명의 직원이 공장에 다시 모였는데 아픈 아버지가 일을 계속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학교를 중단하고 아버지 대신 주물 공장에 나온 거지요. 그때만 해도 6개월 후쯤 공장이 안정되면 당연히 학교로 돌아간다고 생각했지요.”
       
       하지만 김종훈 주물장은 학교로 돌아가지 못했다. 아버지 대신 공장을 맡기로 했던 친구가 기술과 인력을 빼내 다른 곳에 주물 공장을 차리면서 안성주물에 위기가 찾아왔다. 결국 김 주물장은 학업을 중단했고, 안성주물의 3대 대표가 됐다. 그리고 지금까지 63년 무쇠를 녹여 가마솥을 만드는 주물 장인의 삶을 살고 있다. “서울대 농학과 3학년, 학업을 포기했던 당시 결정에 후회가 없었는지”를 묻자, 여든여섯 김 주물장이 웃으며 “저도 사람이니 살아오던 중간 중간 후회도 했었겠지요”라며 “하지만 이게 제 삶이고 평생 그 삶에 감사하며 살아왔고, 지금도 감사한 마음으로 살고 있다”고 했다.
       
       

    ▲ 주물틀에서 나온 상태의 가마솥을 옮기는 모습. photo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서울대 대신 선택한 주물 장인 인생
       
       그런 김종훈 주물장의 뒤를 이어 아들 김성태 대표가 안성주물의 4대를 잇고 있다. 대학에서 생명공학을 공부한 김 대표 역시, 자신이 주물 장인으로 살아갈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았다고 했다. 김 대표는 “어릴 때부터 주물 공장 용광로 근처와 주물 틀 사이사이, 쌓아 놓은 가마솥 틈새가 제게는 놀이터 같은 곳이었다”며 “꼬맹이 시절부터 주물 집안의 피가 흘렀는지 불꽃이 튀고 쇳물이 흐르는 주물 공장이 자연스럽게 익숙했다”고 했다.
       
       김성태 대표는 군 제대 후인 1987년부터 공장에서 일을 시작했다. 아버지를 도와 1990년대 중반까지 김 대표 역시 안성주물의 일원으로 뿌리를 내리는 듯했다. 하지만 1990년대 중반 안성주물이 부도에 몰리며 주물 판을 떠나야 했다. 그렇게 안성주물을 나와 대학 전공인 생명공학 관련 기업에 들어갔다. 능력을 인정받으며 대학원 진학과 해외 지사장 제의까지 받았다. 하지만 주물 집안의 피가 흐르던 그의 마음은 여전히 안성주물에 있었다. 결국 2000년대 초 아버지 김종훈 주물장이 고군분투(孤軍奮鬪)하던 안성주물로 돌아왔고, 본격적인 주물 장인의 길을 선택했다. 그렇게 15년여가 흐른 지금 3대 김종훈 주물장은 2006년 경기도로부터 무형문화재로, 4대 김성태 대표는 2009년 경기도 무형문화재 ‘전수자’로 아버지의 뒤를 잇고 있다.
       
       100년이 넘는 긴 세월만큼 안성주물에는 이야기가 많다. 김종훈 주물장은 “1950년대와 1960년대가 주물산업의 전성기였다”며 “당시 한국 주물산업을 주도한 건 화교였다”고 했다.
       
       “1950년대와 1960년대 서울 종로5가에 ‘쌍화사’라는 큰 주물 솥 공장이 있었고, 인천에는 ‘만화전주’라는 데가 있었지요. 둘 모두 화교 자본인데 전국 주물 상권을 쥐고 있던 곳입니다. 그때 안성주물이 이들과 치열하게 경쟁했어요. 그래서 경기도 안성·용인·평택, 충북 진천 쪽 주물시장만큼은 화교 자본에 넘어가지 않을 수 있었지요. 그때만 해도 거의 모든 집이 무쇠로 된 식기류를 사용했고, 주방 부뚜막에 가마솥을 걸어 쓰던 시절이었지요. 그러니 가마솥 장사도 꽤 잘됐고, 주물산업의 전성기였지요.”
       
       
       주물산업 암흑기 불러온 새마을운동
       
       하지만 주물산업 전성기는 1970년대 들어 빠르게 시들었다. 김종훈 주물장과 김성태 대표는 새마을운동이 주물시장 침체의 시작을 알린 신호탄이었다고 했다. “새마을운동이 벌어지며 전국의 집구조가 바뀌기 시작했어요. 아궁이와 부뚜막을 부수고, 그 자리에 연탄보일러를 설치하기 시작했어요. 커다란 가마솥이 쫓겨나듯 한국의 부엌에서 버려지기 시작했어요. 또 무쇠솥과 무쇠 식기류들도 무겁고 불편하다는 인식이 커지며 외면받기 시작했지요. 그 자리를 스테인리스 식기류와 전기밥솥 등 주방용 전기제품들이 차지했습니다.” 세상이 편리해지고, 사는 여건이 개선될수록 가마솥과 무쇠로 된 주물 제품들은 설 자리를 잃었던 것이다.
       
       김종훈 주물장은 “당시 전국의 주물 회사와 공장 대부분이 사라졌다”며 “그래도 안성주물은 위기를 극복했다”고 했다. 전통적 방식의 가마솥과 함께 새마을운동으로 보급됐던 보일러를 주물 방식으로 만들어 세상에 내놓으면서 새로운 주물시장을 개척하기도 했다.
       
       1989년 안성주물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잘못 받은 어음이 문제를 일으키며 1989년 첫 부도에 몰렸다. 하지만 이때 부도는 크지 않았다. 곧 회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1994년 두 번째 부도는 안성주물을 송두리째 흔들었다. 김성태 대표는 “당시 살던 집은 물론, 안성주물 공장 전체가 남에 손에 넘어갔었다”며 “꿈꾸고 계획했던 모든 것들이 망가졌던 때”라고 했다.
       
       “주물산업이 힘들었지만 저희 나름대로 새로운 주물시장을 만들 수 있다고 꿈꾸기 시작하던 때였어요. 한 대기업으로부터 ‘안성주물의 주물 보일러 기술로 중국에 함께 진출하자’는 구체적 제의도 받았고, 저희도 독자적으로 중국 현지 공장부지 계약과 영업허가까지 받았던 때였지요. 그런데 1994년 부도가 나며 중국 공장과 집, 안성 공장까지 모두 남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당시 부도로 80년을 넘게 이어온 주물 공장 전체가 남의 손에 넘어갔다는 사실이 김종훈 주물장과 김성태 대표에게는 충격이었다. 김성태 대표는 “그때 ‘다시는 주물 안 하겠다’는 생각까지 했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의 아버지 안성주물 3대 김종훈 주물장이 포기하지 않았다. 남은 재산을 끌어모아 남의 손에 넘어간 안성주물 공장을 임대료를 주고 빌렸다. 그리고 다시 용광로를 달궈 쇠를 녹였고, 녹인 쇠로 가마솥을 만들었다. 2001년 한 생명공학 기업의 베트남 지사장 발령이 나 있던 김성태 대표가 그런 아버지 김종훈 주물장 곁으로 다시 돌아왔다. 김 대표는 “아버지가 안성주물을 위해 고군분투하던 모습에 미안했었다”며 “안성주물을 다시 일으키고 싶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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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0년 외국인 선교사가 찍은, 안성장에서 가마솥을 때우고 있는 안성주물 1대 김대선씨. photo 안성주물



       주물 장인, 최악의 부도를 이겨내다
       
       김종훈 주물장과 김성태 대표 부자가 다시 뭉친 안성주물은 빠르게 안정을 되찾아갔다. 2002년 김 대표는 부인이 알려준, 솥에서 국물이 넘치지 않도록 솥뚜껑이 솥 안으로 들어가는 모양의 무쇠솥을 만들어 특허를 받았다. 커다란 전통적 형태의 가마솥 제작은 물론 1~2인용부터 3~4인용까지 다양한 크기와 용도의 개량형 무쇠솥도 함께 만들어 시중에 선보였다. 또 안성주물을 떠났던 동안 아내와 맞벌이로 번 돈으로 빚을 갚았다. 타던 차까지 처분해 직원들 월급을 줬고, 주물 원료인 선철이 들어오면 무슨 일이 있어도 3일 안에 결제해주며 신용을 쌓았다.
       
       그렇게 4년이 지난 2006년 김성태 대표는 3대 아버지 김종훈 주물장에 이어 안성주물의 정식 4대 대표가 됐다. 그가 대표가 되자 안성주물이 빠르게 변했다. 가장 먼저 유통·판매 시스템을 완전히 바꿨다. 이전까지 도매상이나 백화점 등 거래처의 주문이 들어오면 어음을 받고 이들이 원하는 제품을 만들어 팔았다. 주방 식기류를 실제 사용하는 주부나 일반 소비자가 아닌 상인들을 상대로 사업을 한 것이다. 김 대표는 이런 시스템을 뜯어고쳤다. 1990년대 말 이후 한국은 배달 등 물류 시스템이 혁신적으로 발달했다. 또 세계 최고의 인터넷망과 빠른 전자결제 시스템도 구축됐다. 김 대표는 이 점에 착안해 기존 도매상이나 백화점 등 중간상인과의 거래를 없앴다. 대신 2006년 인터넷 판매망을 구축하고 전자결제 시스템을 도입했다. 전국 어디서든 소비자들이 안성주물이 만든 제품을 인터넷으로 직접 확인해 필요한 주물 식기류를 쉽게 주문할 수 있도록 판매구조를 바꿨다.
       
       중간상인을 거치지 않으면서 유통 비용이 사라졌고, 결국 소비자들이 무형문화재가 직접 만든 주물 식기류를 적게는 몇만원에도 살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입소문을 타며 주문이 늘었고 매출도 눈에 띄게 증가했다. 전국 주부들만이 아니다. 곰탕으로 유명한 서울 명동의 하동관, 안성국밥집 등 전국의 이름난 음식점들이 전통 주물 방식으로 제작된 안성주물의 가마솥을 사겠다며 찾아들었다. 전통적 가마솥은 물론 다양한 형태로 개량된 주물 식기류를 만들겠다는 그의 생각, 또 중간상인이 아닌 소비자와 직접 거래하겠다는 그의 판단이 적중했다. 김 대표는 “종종 ‘문화재가 만든 주물 솥이니 한 개라도 몇십만원에 팔 수 있게 해주겠다’고 제안하는 백화점과 중간상인이 있다”며 “이런 제안을 모두 거절하고 있다”고 했다.
       
       “무형문화재가 만든 솥을 3만~4만원에 판다고 하면 ‘왜 그렇게 하느냐’는 반응이 많습니다. 백화점에서 팔면 더 비싸게 팔 수 있고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다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고 싶지 않습니다. 안성주물이 100년 넘게 지금까지 존재할 수 있었던 것, 또 1990년대 중반 부도를 딛고 다시 일어설 수 있었던 건 저희가 만든 제품을 믿고 사준 소비자들이 있었기 때문이지요. 그런 소비자들에게 우리 제품을 부담 없이 쓸 수 있게 해주고 싶습니다. 저희가 힘들 때 믿어준 고객과의 신뢰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편한 곳에서 비싸게 하나를 팔아 쉽게 돈을 벌기보다는, 저희가 좀 더 노력해 많은 사람이 부담 없이 살 수 있고 편히 쓸 수 있게 하는 것, 그게 맞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성태 대표에게 100년을 지속해온 힘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김 대표는 “무쇠는 숨을 쉬는 생물 같은 것”이라고 했다. 무쇠로 만든 가마솥 등 주물 제품이 시대를 넘어 건강한 식기류이기 때문에 100년을 버텨올 수 있었다는 말이다.
       
       또 하나 김 대표는 ‘정직함’도 이야기했다. 굴곡은 있었지만 정직한 제품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진심이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안성주물을 세상에 존재할 수 있게 한 힘이었다고 했다. 김 대표는 “100년 4대를 이어온 안성주물도 분명 다음 100년을 준비해야 할 때가 올 것”이라며 “혈연이 아니어도 쇠를 다루는 주물을 장사가 아닌 한국의 문화로, 또 가치 있는 일로 이어갈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에게 기술을 전수해주고 싶다”고 했다.
       
       인터뷰 말미 김종훈 주물장과 김성태 대표는 “업종을 불문하고 오래 세월을 견딘 기업과 가게들에는 공통점이 있다”며 “정직하고 올바른 제품, 또 사람에게도 도움이 되는 제품을 만들어온 것”이라고 했다. 2100℃까지 끓어올라 불순물이 사라진 순수한 쇳물로 가마솥을 만들어온 김종훈 주물장과 김성태 대표. 그들은 “쇳물 다루는 사람으로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정직하고 올바른 주물을 만들어온 장인으로 기억되고 싶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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